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전투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생각보다 굉장히 치열한 근접전이 자주 발생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군의 조총 사정 거리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 장거리 포격이 가능한 다양한 무기들을 조선 수군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조선 수군은 장거리 포격이 가능한 다양한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왜군과의 해전에서 꽤 일방적인 전투를 벌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실제와 꽤 다르다.
조선 수군의 승리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치열하고 어렵게 얻어진 결과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1.조선 수군의 교전 수칙
일단 먼저 조선 수군의 교전을 한번 살펴보자.
(1)적선이 200보 내로 접근하면 대.중 총통으로 사격하고
(1)적이 100보 내로 접근하면 조총을 사격하고
(1)적이 90보 내로 접근하면 사수가 활을 쏜다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가 발생했음을 알려주는 조선 수군의 교전 거리다.
1보가 대략 1.2m 정도 되니, 200보라면 대략 240m 정도. 생각보다 꽤 가깝다.
그리고 왜군의 조총 사정거리는 100보 정도가 되기 때문에 포격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지점은 200보에서 100보 사이의 약 100m 정도의 구간에 한정된다.
문제는 왜군의 함선은 작고 빠른 속도를 가졌다는 것. 따라서 원거리 사격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좁다.
그래서 조선 수군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교전 구간을 유지하며 싸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는 근접전이 꽤나 빈번하게 발생했고 임진왜란 당시 압도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 휘하 조선 수군의 사망자수가 200여명에 이르게 된 것.(물론 왜군의 사망자수는 10만명을 넘는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 역시 적의 조총에 두 번이나 피탄된 것 역시 이런 전투 방식의 영향으로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조선 수군이 보유한 다양한 대형 총통들은 원거리 공격에만 특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총통이 가진 기술적 한계
바다에서의 전투는 움직이는 배가 움직이는 배를 상대로 싸우기 때문에 사격의 정확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 수군이 보유한 다양한 총통 역시 정확도는 낮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실제로 200보 이내가 아닌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집중적인 포격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합리적이다.
실제로도 영화 '한산'에서도 이런 상황을 재현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을 완성한 이후에도 적이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온 다음에야 집중 포화를 시작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 영화적 고증은 극적 효과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조선 수군은 조총 사정 거리인 100보 이내로 스스로 진입해 전투를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장거리 포격의 압도적 우위가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면 도대체 어떻게 명량해전에서 단 한척의 배로 무려 한 나절이 넘도록 수백 척의 적선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일까.
이유는 2가지로 볼 수 있겠다.
하나는 판옥선의 방어능력이다.
주지하다시피, 판옥선은 왜선에 비해 엄청난 두께와 크기를 자랑한다. 그래서 실제로 근접전이 벌어질 때 판옥선은 왜선을 향해 육탄공격을 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리고 판옥선의 수군들이 사용한 방패 역시 왜군의 그것에 비해 3배 이상 두꺼웠다고 한다.
이처럼 판옥선의 방어능력 자체가 왜의 조총을 막아내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조선 수군의 근접전 능력은 생각보다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천치현황 등의 대형 총통을 다룰 뿐만 아니라 소승자총통 같은 개인화기도 있었고 화살과 검에 이르기까지 전투의 무기체계도 다양했을 뿐 아니라
이런 무기들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정예병력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이들은 원거리 뿐만 아니라 근거리에서도 충분히 잘 싸울 수 있었다는 것.
3.거북선이 필요했던 이유
조선 수군은 함선에서의 포격만으로 왜선을 침몰시킬 수 있었을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했다고 보는게 맞다.
우선 당시의 총통은 폭발력이 없는 무기였다.
즉, 화약으로 무거운 쇠와 나무를 날려보내는 물리적인 공격을 가하는 무기였기 때문에 왜선을 파괴하거나 왜군을 살상하는 용도였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왜선을 침몰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물량의 공격력이 필요한데, 당시 화약이나 철환 등의 물자는 이 정도의 물량전을 할 여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조선 수군은 왜선들을 향해 돌진해 불로 왜선을 태워 침몰시키는 전략을 많이 사용했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근접전에 가깝다.
"순신은 스스로 수군을 거느리고 적중으로 돌격해 들어가면서 화포를 쏘고 50여척을 불살랐다" (선조수정실록. 31년 8월 1일)
그리고 이 대목에서 거북선의 용도가 비교적 명확해진다.
거북선은 돌격선인데 화포 공격은 당연하고 불로 적선을 태워야 함이 그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왜저그이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6월 21일)
따라서 거북선의 머리에서 불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마치 공상과학 취급을 하는 전문가들이 많지만,
필자는 조선 수준의 공격 무기 체계와 전투 방식을 고려해봤을 때 애초에 거북선은 화포는 물론 화공을 고려해 만들어진 돌격선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거북선의 머리에서 불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원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만일 화공이 없이 화포만으로 거북선이 제작되었다면 적진 속으로 돌격해 육탄과 화포의 물량전만으로 적선을 부쉈다는건데, 이것이 더 사리게 맞지 않고 더 공상과학적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보면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이 발현된 이유들을 하나 하나 납득할 수 있는 길이 보일 듯도 하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전승 위업이 얼마나 치열한 전투의 결과였는지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쯤되면 정예 조선수군과 비장의 돌격 거북선을 갖고도 원균이 대패한 과정이 오히려 더 미스터리한 대목으로 연구의 대상이어야 할 지도. 훗.
*본 글은 국립진주박물관의 '화력조선' 시리즈를 상당 부분 참조하였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보시려면 국립진주박물관 유튜브 채널을 방문하시기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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